197. 무의도 기행(1941)- 우울한 경성 떠났으나

2024-10-14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의약뉴스]

경성이 너무 우울하다. 그렇잖겠는가. 식민지 백성이 무슨 활개칠 일이 있겠나.

더구나 아이를 가르친 선생이라면. 그래서 선생은 어느 여름날 수영복 한 벌과 책 몇 권을 싸들고 서해안 섬으로 떠났다. 스물 한살의 꿈과 정열과 감상이 흩어져 있는.

어민들은 여전히 바다로 나가 고기 잡이를 하고 있다. 나는 천명의 집을 찾아갔다. 천명은 내가 6학년 때 가르치던 아이였다. 어미 공씨는 얼빠진 사람이었다. 마루에서 먼바다를 쳐다보며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놈을, 그렇게 나가기 싫다는 놈을. 말 끝을 잊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

대체 천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막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가보자. 천명은 올해 열일곱이다. 항구에서 막 이곳 서해안 작은 섬 떼우리로 돌아왔다. 행색이,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쌀가마의 배가 넘는 소금을 이고 지고 날랐다. 그렇게 서너 달 뒹굴다 왔으니 온몸에는 소금기가 절어 있다. 고생도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씻기고 먹이고 나서 부모는 자초지종을 듣는다. 일본 상점에서 일하다 쫓겨 났는지 그만뒀는지 항구에서 먹고 자고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집에 와 봐야 변변한 것이 없으나 천명의 선택은 그것 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한때는 배를 부렸다.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김종서가 여진을 치고 왔을 때 보다 더 장했다. 하지만 군산서 온 배의 그물을 찢으면서 뱃일이 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외삼촌이 봐주는 것으로 겨우 입에 풀칠해 살고 있다.

공씨 남편 그러니까 천명의 아버지 낙경은 이제 늙고 쓸모없어졌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 기댈수밖에. 그런 천명이 거지꼴로 왔으니 복장이 떠질만하다. 한때 천명은 용유보통학교 졸업생 중 첫째로 졸업한 수재다. 구장이나 선생이 섬에서 썩기 아깝다며 공부시킬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형편이 안 된다. 이웃 마을 구주부가 그런 천명을 눈여겨봤다. 자신의 딸 희녀와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 더구나 천명은 자신의 부인이 받아냈으니 인연도 있다. 구주부는 천명이 한의사를 하다 양의를 배워 총독부 의사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란다.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외삼촌 공주학은 반대다. 데려다가 약재를 썰게 하고 몇 면 부려먹고 내 쫓을게 뻔하다는 것. 구주부가 그런 이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학이는 그를 싫어한다.

▲ 함세덕의 이 작품은 빼어난 문장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가 아주 탁월한 명작이다.

천명을 자신의 배에 태우고 싶어 하기 때문. 기왕 남에게 삯을 주느니 조카에게 주는 게 낫다는 것. 하지만 공씨나 낙경은 반대한다. 아들 둘이 장가도 못가고 배를 타다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 남은 아들만은 살리고 싶다.

하지만 주학이가 발동선을 사면 일등항해사와 선장을 시킬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아들을 떠다민다. 천명은 식칼을 들고 자살 소동을 벌이면서 저항하지만 끝내 삼촌의 배에 오른다.

그런데 삼촌의 배는 낡을 대로 낡았다. 배 밑창에 구멍이 뚫렸다. 이번 출항을 마지막으로 나뭇값이라도 받고 팔 심산이다. 구주부는 그 사실을 알고 한달음에 달려와 낙경과 공씨에게 알린다.

애초 배를 타기로 했던 성서방은 이미 포기했다. 낙경은 그게 정말인지 그렇다면 천명을 배에 태울 수 없다. 하지만 자기 배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처남 공주학의 말을 믿는다.

공씨도 동생말을 따른다. 무당을 보고 점을 쳐봐도 천명이는 바다에서 먹고 살 팔자라는 말을 듣는다. 고사도 지냈다. 공씨 부부는 천명을 바다로 떠민다. 드디어 출항하는 날.

그날따라 높새바람이 불고 동아( 숭어새끼)떼가 득시글하게 덕적으로 몰려간다. 바닷물이 동아 그림자로 시커멓다. 공씨는 그 날 이후 날마다 사발에 물을 받아 놓고 천지신명께 빈다.

그러나 천명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배는 만선을 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난파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아들 셋이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다. 뒤늦게 낙경이나 공씨가 울고 불고 해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앞서 선생이 만난 공씨가 그런 상태였다. 강원도에서 숯이나 굽고 강냉이나 팔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다. 연평에서 조기 잡으면 돈 벌기는 물 묻은 손에 모래 줍기라는 말에 속았다. 땅팔고 집팔고 온 꼴이 이렇게 된 것이다. 우울한 경성을 떠났으나 어민의 생활은 더 우울했고 비참했다. 

함세덕의 <무의도 기행>은 엄청난 작품이다. 읽고 나니 이런 작품을 이 시기에 썼구나, 감탄이 절로 나온다.

35살에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글을 계속 썼더라면 한강에 앞서 노벨문학상을 받고도 남았을 재주가 아깝다. 일제때는 친일연극 단체에 가담했으며 해방 후에는 좌경에 빠져 월북했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 위문대로 참전해 사망했다.

조선일보에 <해연>으로 등단한 후 <서글픈 재능> <낙화암> <무의도 기행> 등 20여 편의 작품을 남겼고 남긴 작품 모두 고른 수준을 보여 식민지 시절 대표적인 극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 극중에는 주인공 말고 여러 조연이 등장하는데 이들 역할을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다. 앞서 낙경의 세 아들이 모두 배를 타다 죽은 것은 밝혔다.

세 아들 말고 딸도 있었는데 그 딸 천순은 청나라에 팔려 갔다. 혼인 직전까지 갔던 천순의 예비 남편 판성은 걸어서라도 천진에 가서 천순을 꼭 한 번 보고 죽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 다짐은 다짐으로 끝난다.

이밖에 성서방이나 노틀 할아범, 직지사에서 왔다는 어부 등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들도 수준이 높다. 유머에 웃다가 처한 현실에 가슴이 뭉클해 진다.

이런 연극이 해마다 전국에서 상연됐으면 싶다. 대사가 야무질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대 어민들의 궁핍한 생활을 가득 담고 있어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