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책을 덮고 나면 늘 책 밖의 일이 궁금했다. 주인공이나 그 주변 인물들의 다음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상상을 하곤 했다. 그래서 후기나 에필로그 같은 게 있다면 좋겠다고 종종 생각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나의 희망을 들어줬다. 두툼한 책 <죄와벌>을 다 읽고 나니 뜻밖에도 내가 기대했던 것이 있었다. 세상에나, 이런 일도 있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후기에 따르면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시베리아 유형길에 올랐다.( 유배지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험난할 터. 돈도 많이 들고 기간도 길다. 거기로 가는 길의 고역은 톨스토이의 <부활>에 잘 나와 있다. 여기서는 그런 과정은 완전히 생략됐다.)
그가 내가 관리 미망인 노파와 그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훔쳤다고 자백했기 때문이다. 살인을 했고 그것도 두 명이나 죽였으니 그는 일급 살인죄로 처형돼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는 끔찍한 이런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겨우 8년 형기를 선고받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다.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지 않고 자수했고 그 당시 정신적인 이유가 있었고 그의 친구 드리트리가 그의 선행을 증언했고 뭐, 기타 등등 여러 사정이 정상 참작됐다.
여기서 라스콜니코프가 왜 죽였는지에 대한 이유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죽인 노파를 엄지손톱 사이에 끼어 죽이는 이로 생각했다. 하찮은 벌레를 죽인 것이지 인격이 있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아무리 관처럼 비좁고 답답한 하숙방에 스스로를 감금하고 몽상에 빠져 있다고 쳐도 그렇다. 뭐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더구나 사회의 해충이라면 죽어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악을 하나 없애도 수천의 선한 일을 한다면 과연 거기에 따른 죄를 받아야 하는가. 그는 이를 죽였고 따라서 특별히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이가 아닌 사람의 환영이 어른거렸고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정신은 시도 때도 없이 분열됐다.
한편 그 당시 대학생은 최고의 선택받은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더구나 법학과여서 졸업을 하면 법조인이나 존경받는 교수의 자리는 보장됐다. 사회 기득권층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한 순간을 참지 못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노파를 죽였다.
비록 그 노파가 자기만 알고 상대를 이해못하는 고리대금업자 전당포 주인이라고 해도 이건 정상적인 관계로는 이해할 수 없다. 라스콜니코프가 어머니를 부양하고 동생 두냐를 책임져야 하는 가정의 역할에 내몰리고 궁핍에 시달렸다고 해도 그렇다.
인간의 복잡 미묘한 심경을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고 해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이런 의문은 들 수 있다. 나폴레옹은 셀 수 없는 사람을 죽였음에도 추앙받고 어떤 이는 겨우 이 한 마리를 죽였을 뿐인데 살인자가 된다면 이건 너무 억울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죄를 짓고 그 죄를 시인하기는 했지만 용서를 빌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는 특별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옥에서 그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운명적인 순간에 저지른 일이 어리석거나 추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이유다.
형사상의 범죄라 하더라도 악행은 아니고 따라서 양심은 평온하다. 이런 상태의 라스콜니코프는 수형생활을 제대로 할까. 에필로그를 또 따라가 보자. 어느새 수형생활 여러 개월이 지났다.
그를 남편처럼 따르는 소냐는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인다. 어린 나이에 거리의 여자였던 소냐. 그는 운명처럼 만난 주인공에 푹 빠져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무시한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녀에게 그는 신과도 같은 존재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인공도 소냐를 사랑한다.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사랑만이 흐트러진 그의 정신을 구할 수 있다. 그러면서 신의 존재를 의식했다. 둘은 맺어질 수 있을까. 형기를 다 마치고 나도 라스콜니코프는 32살이다.
얼마든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나이다. 미래의 아침놀이, 새로운 삶을 향한 완전한 부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여동생 두냐는 오빠의 친구이면서 조건 없이 그에게 우정을 바쳤던 드미트리와 결혼한다.
휴학하기 전에 논문을 잡지에 발표할 만큼 똑똑한 아들의 성공만을 바랐던 어머니는 아들이 큰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어디 먼 곳으로 오랫동안 떠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그랬을 것이다. 엄마가 아들이 살인자 인것을 아는 것은 잔인하다.) 천국에 들었다.
거칠게 요약한 본문과 에필로그는 이렇다. 그런데 나는 또 궁금하다. 에필로그 이후에 그러면 주인공은 또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에필로그에 사족을 붙여본다.
라스콜니코프는 형기의 절반도 채우지 않고 출소한다. 모범수로 법원이 그에게 특별히 가석방을 내린 결과다. 다른 죄수들과 협력하고 무엇보다 성심성의껏 복역하고 그 자신도 어렵고 힘들지만 다른 이들을 위한 헌신에 감복 받은 죄수와 간수와 법원 관리자들이 라스콜니코프에게서 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이라고 모두 판단했다. 이런 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나 할 짓이다. 출소한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와 결혼한다. 어린 화동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갈 때 맞아 주는 사람은 여동생 두냐와 드미트리다.
둘은 모스크바에 정착한다. 주인공은 마저 학업을 마치고 신망 높은 판사가 된다. 그는 법의 엄격함보다는 관대함으로 죄수들이 스스로 깨닫는 판결을 내린다. 소냐는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죄수들의 뒷바라지를 한다.
둘은 성자로 추앙 받는다. 살인자를 이렇게까지 옹호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알 수 없음이다. 삶은 변증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동정심을 일으키게 만든 것은 작가의 처절한 투쟁의 산물이다.
팁: 인간보다 못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인간보다 못한 사람, 짐승 같은 인간 등등.
그렇다면 인간보다 못한 짐승은 죽여도 되는가. 벌레를 죽이듯이 살인해도 되는가. 목적이 좋으면 개개의 악을 허용되는 것이 옳은가. 천재적인 인간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해도 되는가.
살인을 하고 나서 그보다 수천, 수만의 선행을 하면 그 살인은 온전히 사함을 받을 수 있는가. 나폴레옹이나 다른 전쟁영웅들의 살인은 용서받을 수 있는가. 그들은 신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 라스콜니코프도 당연히 했을 것이다. 그 나름대로 삶에 대한 이론이 정립돼 있을 터.
사욕과 권력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위대한 영웅들은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신의 가호를 빌지도 않으면서 판사의 판결을 받지도 않는다. 살인만 놓고 보면 다 같은 사람을 죽이는 행동인데 말이다.
한편 앞서 언급한 주인공 외에도 숱한 흥미로운 인간들이 등장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을 그가 자백하기 전에 확신한 예심 판사 포르피리나 두냐의 약혼자 루쥔이나 두냐의 가정교사로 두냐를 사랑했으나 거절당하자 거액을 소냐에게 주고 자살한 스비드리가일로프 등은 나름대로 특색있는 조연을 잘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