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 자손까지도. 그러니 누구나 처세술의 달인이 되고 싶어한다.
정당하게 한다면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다. 하지만 대개는 불법으로 성을 쌓고 탈법으로 금고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 오영진의 희곡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의 주인공 이중생만 해도 그렇다.
식민지 시대에는 외아들을 황국의 아들로 전쟁에 보내는 등 일제에 충성을 다했다. 전쟁이 끝난 혼란한 시기에는 이런저런 사기 등으로 부를 쌓았다.
대궐 같은 집에서 머슴 용석 아범과 두 명의 하녀를 두고 호화생활을 하는데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내친김에 경제 원조와 융자를 받아 임업 회사를 더욱 키울 요량으로 오늘도 분주하게 비서 임표운과 함께 중앙청과 은행의 인사를 만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큰딸 하주는 남편 송달지가 아버지에게 힘이 돼주지 못해 못마땅하다. 한다는 것이 환쟁이나 글쟁이들과 인생이 기네 짧네, 같은 한가한 소리만 하고 있다.
송달지 내과의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환자가 없다는 핑계로 병원도 잘 나가지 않는다. 이중생은 답답하다. 자신의 반도 임업이 한국 임업을 독점하고 은행 융자로 수백만 달러의 제지 기계를 들여놓으면 한국의 종이는 죄다 지폐를 포함해 자신이 공급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는데 사위가 영 미덥지 못하다.
설상가상으로 이중생이 하는 일도 어긋나고 있다. 미국 기관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융자를 책임질 란돌프라는 인물이 사기꾼으로 판명난 것. 둘째 딸 하연과 인천의 별장에서 함께 지내게 하면서 란돌프를 이용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거기에 막대한 돈을 잃은 이중생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반전을 꾀한다.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새로운 해결책을 위해 출타하는데 그 사이 집에는 순경이 들이닥쳤다.
이중생 역시 구리개 근처에서 형사에 체포돼 수감됐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부인 우씨와 큰딸 하주는 안절부절이다. 그러나 둘째딸 하연과 사위 송달지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다.
하연은 자신이 지냈던 인천 별장은 아버지가 관리인을 속여 뺏은 것이고 란돌프는 국적도 없으면서 미국 원조 기관 직원을 사칭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사위 달지는 딸마저 출세의 길로 이용해 먹는 장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1막이 이렇게 주인공에게 위험이 닥치면서 끝나고 2막이 시작됐으나 이중생은 회복 기미가 없다. 형 이중건은 동생에게 속아 집 한 칸마저 뺏겼다며 화풀이를 한다. 집안에 망조가 들려도 단단히 드렸다.
부인 우씨와 큰딸 하주만 감옥에 갇힌 아버지 걱정이다. 이런 와중에 사위 송달지는 아내의 잔소리에도 장인어른이 쉽게 나오지 못할 거라고 염장을 지른다. 배임 횡령에 공문서 위조, 탈세 등 죄목을 줄줄이 외운다.
둘째딸 하연도 마찬가지다. 우씨가 보기에 이런 것도 사위이고 딸인가 싶다. 하주는 아버지 걱정도 걱정이지만 어머니와 자신들 살 궁리에 여념이 없다. 딱한 건 우리라면서 어떻게든 돈을 빼돌릴 궁리를 하고 있다.
한편 이중생은 운 좋게도 최변호사와 함께 집으로 들어선다. 특별 단기 보석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것. 이중생은 오자마자 대지, 가옥, 건국제지, 반도 임업 등 돈 되는 것을 빼돌리기 위해 최변호사와 상의에 들어갔다.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돈이 녹아나 졸지에 거지가 되는 형국은 피해 보려는 것. 최변호사가 꾀를 낸다. 죄를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위대한 사업가 이중생이 사라지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땅 위에서 없어져 죽는 것. 살아 있지만 죽은 체 하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좀 모자라서 돈을 가로채지 않을 충직한 재산 관리인으로 사위 송달지에게 모든 재산을 넘긴다는 유서를 쓴다.
가짜로 죽는다는 최변호사의 작전에 이중생은 좋은 꾀라며 동의한다. 살아 있는 이중생의 사망진단서는 의사 사위 송달지가 쓰고 부고 인쇄도 끝났다. 한편 운동장에서는 시민궐기 대회가 열린다. 하연에 따르면 모리배 타도, 우리 아빠 같은 것, 숙청하기 위한 데모라는 것이다.
팁: 2막에서 이중생은 면도칼로 자살했다. 최변호사의 그게 제일 깔끔한 방법이라는 충고를 따른 것이다. 3막이 시작되면 다다미방 병풍 뒤 관에 누운 이중생은 병풍 밖의 조문객들 대화를 엿 듯는다.
아직 오일장은 끝나지 않고 조문객들의 발길은 이어지지만 정작 이중생이 기대하는 관청에서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관에 누운 그는 생각한다. 나쁜 놈들, 아무리 인정이 백지장 같기로서니 이럴 수 있나, 다시 살아나가면 인정사정 없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올 사람은 아니 오고 엉뚱한 국회 특별조사위원회 김의원이 당도한다. 그는 이중생의 불법을 훤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재산 상속자 상주 송달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보건 시설이 불충분하니 무료 병원을 세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송달지도 그런 생각을 평소 해 왔던지라 덜컥 수락하고 만다. 내가 의사 공부를 한 것은 그런 의미라면서 의사는 상업이 아니다, 라고 확고하게 말한다. 그 소식을 관 속에서 들은 이중생은 노발대발한다.
마치 자기 돈처럼 마음대로 쓰는 사위가 자식이 아니라 원수다. 평생 일군 돈을 그런데에 쓸 수 없다. 최변호사도 나선다. 개인 재산을 다른 가족 상의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김의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중생의 죄명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법적으로 처리하게 되면 고인에게는 아무런 재산도 남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는다. 김의원이 가고 나자 관속의 이중생이 벌떡 일어나서 사위 달지에게 따지고 그 와중에 최변호사와도 언쟁을 벌인다.
이제 이중생은 혼자가 됐다. 그때 생사를 몰랐던 외아들 하식이 들어오고 아직 수의를 벗지 못한 아버지를 보고 옷차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찌됐든 이제 막은 끝나가고 있다. 이중생은 아들, 둘째 딸, 사위에게 버림을 받았다.
달지는 자신을 바보 천지라고 욕하는 하주의 따귀를 때리고 상갓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하식은 말한다. 아버지 시대는 지났다고. 우리를 새로운 권력과 독재자에게 팔아넘기려는 원수가 있다고 매형 달지에게 하소연한다.
이제 이중생에게 남은 것은 진짜 죽음 뿐이다. 면도칼로 경동맥을 그은 것이다. 광복군으로 아들을 내보냈다가 일본군에 맞아 죽은 용석 아범이 이중생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는 널을 헤치고 시체가 나왔다고 비명을 지른다. ( 용석 아범은 실제로 그 이전에 이중생이 죽은 것으로 알았다.) 대궐 같은 이중생의 집에 달빛이 유난히 밝은 가운데 스님의 독경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불 가리지 않고 재산을 모으려는 이중생 같은 인물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오영진은 친일 잔존 세력이 몰락하고 새로운 세상이 왔으면 하는 바람을 등장인물을 통해 희망하고 있다. 그는 안창호, 조만식 등 민족 지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인 학도지원병 제도에 반대했다. 해방 직후 월남해서는 반공 활동에 적극 가담한 이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