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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O 2024-Epilog 2] 한국 임상의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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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O 2024-Epilog 2] 한국 임상의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다
  • 의약뉴스 송재훈 기자
  • 승인 2024.06.05 12: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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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축제의 이면, E홀에 드리워진 그늘

[의약뉴스 in 시카고] 

한숨 소리가 길어지는가 싶더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뭐라도 말을 건네야 할 것 같은데, 트리거가 될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의학계에, 임상연구 발전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이 보잘 것 없는 기자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진다.

제약 산업 기자라면 임상 연구 논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근본도 없이 천방지축 뛰어다닐 때, 수준 낮은 질문에도 핀잔하지 않고 항상 따뜻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해 주던 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부정확한 정보와 상업적 멘트가 난무하는 취재 현장에서 끼니를 거르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기자를 만나 항상 객관적인 시선으로 중심을 잡아주고, 근본 없는 질문에도 오히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격려했던 이유는 기자가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환자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늘 당당하고 크게만 느껴졌던 그가 오늘따라 한 없이 움츠러든 어깨로 E홀을 향해 가는 모습에 감정이 이입돼 가슴 한 켠이 시려온다.

 

▲ 전 세계 종양학 연구자들의 축제가 화려했던 5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 전 세계 종양학 연구자들의 축제가 화려했던 5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해마다 미국임상종양학회 학술대회가 열리는 시카고 맥코믹센터에서는 코엑스 서너개를 붙여놓은 것 같은 넓은 건물의 수많은 방에서 짧게는 5분, 길게는 12분 단위로 최신 연구 결과들이 쏟아지고 박수와 환호가 이어진다.

이 넓고 넓은 건물 곳곳에서 분단위로 밀어내도 소화하지 못하는 연구들은 벽보 형식의 포스터로 게재돼 3~4시간 시선을 끌고 이내 다른 포스터에 밀려난다.

수 만 명의 인파가 박수와 환호, 열띤 토론으로 축제를 즐기는 메인 홀 아래, 2층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빛이 들지 않은 어두운 지하에 컨테이너 박스로 가득 찬 E홀이 자리하고 있다.

수천, 수만명의 청중과 함께 학술 성과를 공유하는 메인 홀과 달리 E홀에서는 취조실처럼 생긴 컨테이너 박스에서 보다 심도있는 대화가 오고간다.

자본력을 가진 빅파마들이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만나는 자리로, 연구자들이 교류하며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발전해 메인 홀에서 꽃을 피운다는 측면에서 보면, 종양학 연구의 인큐베이터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암 환자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학문적 성과들이 결국 빅파마들의 자본력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 외부의 빛이 들어오지 않아 지하나 다름없는 이 곳 E홀은 항암 치료 패러다임 전환을 이끄는 아이디어의 산실이자, 환자를 위해 한 자리라도 더 얻으려 연구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 외부의 빛이 들어오지 않아 지하나 다름없는 이 곳 E홀은 항암 치료 패러다임 전환을 이끄는 아이디어의 산실이자, 환자를 위해 한 자리라도 더 얻으려 연구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외부의 빛이 들어오지 않아 지하나 다름없는 이 곳에 단색의 컨테이너들이 가득차 차갑고 삭막한 느낌을 주지만, 그나마 밝은 조명 덕분에 무거운 공간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런 이 공간이 오늘따라 유독 쌀쌀맞게 느껴지는 이유는, E홀로 들어서는 노 교수의 뒷 모습이 한 없이 쓸쓸하고, 축처진 어깨가 더 없이 무거워 보였기 때문일 터다.

존경받는 학자라 하더라도 이 곳에서는 때로 임상 연구를 유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세일즈맨이 된다.

미충족 수요를 해결할 수 있을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이미 열린 임상 연구라면 한 자리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때로는 읍소하기를 마다 하지 않는 공간이다.

그렇게 힘겹게 얻어낸 자리는 새로운 치료의 기회가 되어 누군가에게 삶의 희망을 제공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고용 창출의 기회가 되어 일자리가 된다.

시장이 작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우리나라가 전세계 임상 시험 등록 건수 5위, 도시에서는 서울이 1위로 올라선 배경에는 이처럼 학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 주목을 받지 못한 연구도 환자들에게는 희망이었다.
▲ 주목을 받지 못한 연구도 환자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올해는 예년보다 한국 연구자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다양한 암종에서 우리나라의 연구 성과로, 혹은 글로벌 임상의 주 저자로 무대에 서는 연구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자부심을 갖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이 무대에 서기까지, 그만큼 우리나라 환자들은 치료의 기회가 늘었고, 결코 적지 않은 전문직 일자리가 새로 생겼을 터다.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의 임상 역량이 높아지면서 서양에서 외면하던 위암이나 식도암 등 소화기암 임상이 열리고, 성과가 도출되면서 치료제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임상 연구자들의 성과를 개인적 성취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하지만, 이처럼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임상 연구자들이 찬란하게 빛날 때, 한국의 임상 연구에는 경고등이 켜졌다.

그렇지 않아도 숫자를 앞세운 중국의 공세에 위축되고 있던 가운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의료대란의 여파가 심상치 않다.

환자 등록이 지연되고 등록된 환자 관리도 어려워져 한국이 자랑하는 질과 양 모두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이 상태가 지속돼 환자 모집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렵게 얻어온 자리를 다른 나라에 내어 줄 수도 있다는 경고다.

▲ 학술대회가 마무리되면서 기자실도 텅 비었다. 기자실이야 내년이면 다시 차겠지만, 임상 연구에서 한 번 빼앗긴 자리를 다시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 학술대회가 마무리되면서 기자실도 텅 비었다. 기자실이야 내년이면 다시 차겠지만, 임상 연구에서 한 번 빼앗긴 자리를 다시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내어준 자리를 다시 찾아오는 것 보다, 그렇게 한 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한국 임상 연구가 눈부시게 발전한, 지난 20년의 성과가 이대로 무너지지는 않을까, 은퇴를 앞 둔 노 교수의 한숨이 길어지고, 눈시울이 붉어진 이유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 따르면, 지난 2022년 KRPIA 회원사들이 우리나라에 투자한 임상연구비는 8000억에 이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2022년 연간 약품비가 24조 5000억 규모로, 약품비가 연간 건강보험 지출의 23%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임상연구의 상당수가 치료제가 없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치다.

지난 20여년 간 임상 연구자들이 E홀처럼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치열하게 세일즈한 결과 한국의 임상 역량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하고, 치료의 기회와 고용창출로 이어졌다.

그러나 꽉막힌 규제와 약가 체계로 한국 시장의 매력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강력한 내수 시장을 앞세운 중국이 무섭게 성장하며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이 시기에, 안타깝게도 의대 정원을 둘러싼 논란으로 의료 대란이 발생하며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노 교수는 당장 어렵게 확보한 자리를 다른 나라에 빼앗기지는 않을지, 멀게는 이대로 어렵게 쌓아온 우리나라의 임상연구 역량이 무너지지는 않을지, 한숨을 떨치지 못했다.

의대 정원을 증원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필요하다 한들 이처럼 파괴적인 방법 외에는 없었는지 되묻고 싶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환자를 위해 뛰어왔고, 지금도 환자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이들을 욕심이 많다 매도하며 비난하는 폭력적인 언행은 자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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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용 2024-06-08 07:47:59
현지에서 취재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고 좋은정보뿐만 아니라 느낌과 우리나라 의료계와 환자분들을 걱정해주시는 의견과 생각을 전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읽은 기사중 가장 인상 깊은 기사네요.

2024-06-07 19:25:00
매우 적절하고 훌륭한 분석입니다.
의료파탄의 한가운데서 바라보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