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53. 하나의 생각. 무엇을 하더라도 그 생각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떼어 낼 수 없다, 도저히. 한 번 들어온 생각은 똬리처럼 깊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생각들은 압도당했다. 민혁의 여친이 자리를 뜨자마자 그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잠시 떠나 있었던 것을 만회라도 하듯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들어와서는 말뚝처럼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한순간도 승길을 떠나지 않고 잠시 밀려 있었을 뿐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주인은 자리를 잡고 앉아 떠날 기미가 없다.
무거운 엉덩이. 밥을 기다리는 것일까. 누군가를 호령하려고 낯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른다. 승길은 잡생각이다, 잡생각, 하면서 벌렁 누웠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좀 나을 것이다. 하지만 눕자마자 곧 일어났다.
다시 그 생각이 뇌의 시상하부를 침범했다. 얼마남지 않았다, 그렇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은 연초에 오지 않을 것 같은 연말과 같았다.
오면 어떻게 되나? 어떻게 될 건 없다, 아니 있다.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많이. 하지만 일상을 유지하려고만 하면 안 될 것도 없다. 경험 없는 청춘도 아닌데.
산전수전 다 겪은 승길. 오려면 오라며 태연한 척 한다. 하지만 그날이 위협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경험이 있기에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화길이 말한 디데이. 의심할 여지없다. 무엇이든 터지거나 일어나는 것은 자명하다. 몰랐다면 속 편할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더니 알고 나니 속이 더부룩하다.
언제 화색이 돌았냐는 듯이 어벙벙한 상태의 승길. 그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가면 백아가 아니다.
“아니 그 표정은?”
그 말을 듣고도 승길은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한다. 승길은 민혁과 여친이 나간 뒤 배가 나왔다는 그 얘기 조차 하지 못했다.
“관심이 없는 거야? 왜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아냐, 그런 것 아냐. 내 말했잖아. 좋다고, 그만하면 더 바랄게 없다고.”
“그런데 왜?”
“시큰둥하냐고? 그렇게 보여?”
“어 그렇게 보여.”
백아는 넋이 빠진 것 같은 승길에 불만이다. 아무리 스몰웨딩이라고 해도 챙길 건 챙겨야 한다.
“옷을 하나 사야겠어. 당신도 이참에 하나 사지.”
“나는 노. 당신거나 사자.”
이렇게 말해 놓고 더 말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승길은 “지난번 조카 결혼식 때 입었던 것도 좋던데” 하고 말해버렸다. 승길은 그걸 하고 나서야 또 깨달았다.
“내가 무슨 옷을 산다고. 나처럼 옷 안 사는 여자 있나 보라고? 나참. 새옷이 기막히다 이거지.”
“쏘리, 그런 뜻이 아니고.”
승길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래 사자, 누가 사는걸 반대한 대. 그냥 그때 입었던 옷이 어울리니까 그보다 나은 옷을 못 고를까 노파심에서 그런거지.”
“됐네, 이 사람아. 그 속셈 모를 줄 알고.”
하지만 백아는 더 시비 걸 생각이 없다. 승길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고 자신도 그런 골치 아픈 일로 실랑이 벌이고 싶지 않았다. 더 신경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감정 소비를 하다니.
더 언쟁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인 것은 승길도 마찬가지였다.
"어, 그런데 여친 배좀 봤어? 좀 나온 것 같던데?"
생각난 김에 승길은 빠르게 말했다.
"내가 말 안했던가? 난 한 줄 았았는데. 몇 개월 지났나봐?"
"예정일은? 그래서 식을 서둘렀구나."
"그건 나도 몰라. 잘 된 거지. 빨리 키우면 좋지, 안그래?"
싱겁게 끝났다. 뭐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호들갑 떨었던 승길. 비밀을 알려 주려고 은근하게 다가가기 까지 했으나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승길은 갑자기 자기가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의 주제가 사라졌다. 다시 혼돈 상태의 승길. 젠장, 거기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거기로 빨려들었다. 디데이. 생각은 빙빙 돈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 그리고 다시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 결론은 없다.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 알려야지, 가만히 있는 건 비겁한 거야. 당연하지, 그렇게 하자. 그렇다면, 그렇게 한다면 막을 수 있을까.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설 수 있다면 청와대 신문고에라도 올려볼까. 그런다고 믿어 줄까. 이미 여러 경로에서 그것에 대한 경고가 나왔고 아니라고 부정까지 했다. 그런 마당에 필부가 디데이가 있다고 떠든다고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 줄까.'
이리저리 왔다갔다 방안을 도는 승길.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날짜가 한 발 한 발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승길은 되레 침착하다. 더 차분해 졌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가. 아니면 숨죽인 채로 하루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인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열리는 비상 탈출구. 오늘도 승길은 그곳으로 향한다. 운동화 끈을 동여 매기만 하면 된다. 무엇에서든 벗어나는데 최고다.
가장 단순한 것. 정해진 곳을 향해 달려나갈 때 생각도 달리고 시간은 빨리 흐른다. 승길은 도림천을 지나 안양천으로 나왔다. 그 새 기분이 다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리게 아주 느리게 박자를 맞춘다. 척척 척척.
이 정도 페이스라면 벌써 20분은 지났다. 주변을 의식적으로 둘러본다. 가을이 확연하다. 부인할 수 없는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은 눈이 아니라 온 몸이다. 아직 몸은 데워지지 않았다.
지면에서 알다리로 찬 기운이 올라온다. 달궈진 아스팔트가 언제 식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몸은 안다. 그 몸이 반응할 때 쯤이면 이대 목동 병원을 지나야 한다. 거의 정확하다, 몸의 시계는.
이제 정상적인 기온으로 올라온 몸이 대견스럽다. 군불을 때지 않고도 몸이 데워졌다. 물속의 개구리는 아니다. 개구리처럼 죽는지도 모르고 죽지 않는다. 그게 달리기 힘이다.
알아서 몸을 데워주고 알아서 버티게 해준다. 승길은 그날이 와도 계속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다짐한다. 달린다는 이유만으로 누가 잡아가지 않을 것이다. 체포영장을 들이밀지도 않고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만한 양심은 있을까. 기대할 수 없어도 할 수 없다. 달릴 수만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 고 승길은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달릴 수만 있다면 숨을 쉴 수 있다, 고.
오늘은 몸을 더 혹사한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말짱한 정신으로 내일을 맞기 위해서는 잠을 푹 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는 뗄 수 없는 지경에서 한 발 더 달려나가야 한다.
그게 지금 승길이 몸과 한 약속이다. 약속을 깰 이유는 없다, 아직 까지는. 그래서 승길은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부까지 왔는데도 돌아가지 않는다. 한강을 따라 여의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맞바람이 불자 돌아서 가양대교 쪽으로 몸을 틀었다.
등에 맞는 바람이 좋다. 그러면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물결이 인다. 낮인데도 검다. 검푸르다고나 할까. 그런 한강의 물빛을 따라 나란히 달린다. 숨차지 않다. 힘들지 않는다. 페이스대로 그저 달린 때문이다.
승길은 생각한다. 달리지 않으면 멈추니까 멈추지 않기 위해 달린다,고. 반대편의 러너들도 그런 심정일까. 그들은 나의 스승이다. 그들의 표정, 그들의 내두르는 손짓을 통해 나를 본다.
또 나는 스스로 나의 스승이다. 거울이 없어도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오늘이 가장 많은 거리를 뛴 날이 될지도 모른다. 풀코스를 예약 했으면서도 23킬로 미터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적어도 삼십 킬로 경험은 있어야 한다. 아니 38킬로. 거기까지 왔다면 나머지는 우격다짐으로라도 갈 수 있다. 그러려면 행주대교 너머 김포까지 갔다와야 한다. 내친김에 그럴 수 있을까.
믿는 구석이 있다. 주머니 속의 비밀 병기. 그거라면 몸이 버텨줄 것만 같다. 15킬로 지점에서 비타민을 털어 넣는다. 레이스에서 받은 것을 챙겨오길 잘했다. 작은 초콜릿도 있다.
물은 아리수를 먹으면 된다. 하지만 땀이 나지 않아 수분 보충은 아직은 필요하지 않다. 강 건너를 바라본다. 몇 년 전에는 훤히 보였는데 병풍처럼 아파트가 들어섰다.
짓기만 하면 사람들이 들어차는가 보다. 그 전에 그 사람들은 어디서 살았을까 궁금해진다. 저 집이 있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생각은 달리기에 도움이 된다. 생각하다 보면 왼쪽 무릎의 고통도 잊는다.
그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 대체 이 생각만으로 삼십 분을 버틸 수 있다. 경기도 혹은 대구나 광주. 경기도라면 서울 생활권이니 그렇다 치자. 지방에서 왔다면 일자리를 새로 얻었나. 아니면 복권이라도 당첨이 됐을까.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행주대교 바로 아래에 섰다. 갑자기 다리가 무겁다, 땅으로 발이 빠져들고 있다. 눈 속으로 발을 딛는 기분이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행주산성의 능선이 어른거린다. 왜놈들과 저기서 한바탕 했겠다? 행주치마에 돌을 날랐겠다? 뜨거운 물을 쏟아 부었겠다? 놈들이 뒤로 물러난다. 잔뜩 겁먹은 표정이다.
고소하다. 뭐라도 보태야 하는데, 짱돌이라도 주워와야 하는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저기까지만. 나란히, 행주산성과 나란히 내 몸이 서면 그때 돌자. 돌자고 마음먹고도 더 내딛는 승길.
빠졌던 다리가 이번에는 붕붕 떠오른다.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데도,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은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멈춰 있는 기분이다.
무조건 저기서 턴이다. 더는 무리라는 것을 안다. 로또 당첨 소식을 들어도 더 달릴 수 없다. 내 몸을 안다는 것, 그걸 안다는 것에 승길은 만족한다. 비타민도 효과가 없다.
믿는 구석에 발등이 찍혔다. 초콜릿 먹은 게 탈이었을까. 아리수를 먹기 위해 잠시 멈추자 다시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힘들면 걸으세요?”
물 한 모금 마시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데 입가를 다시면서 출발 준비를 하던 청춘의 러너가 말한다. 동료 의식으로 뭉친 그가 승길의 얼굴을 본 것이다. 얼굴만 보고도 이 사람이 더 달릴 수 없다는 걸 안 모양이다.
“그럴 생각입니다. 한 23킬로 정도 뛰었거든요.”
“전 여의도에서 출발해 김포 깊숙한 곳까지 그러니까 강화까지 갔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니 얼추 저와 비슷한 거리네요.”
그가 힘내세요, 하면서 등을 보이고 뛰기 시작했다. 젊음이 괜히 젊음인가. ‘나도 저 나이 때는 날라다녔다,’ 이런 생각이 드는걸 보면 승길은 아직 쓰러질 때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