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팔. 늦잠 자겠다는 지난 밤의 각오는 눈 뜨고 나자 사라졌다. 일찍은 아니지만 9시 정도에 일어난 승길은 일어나자 마자 또 라면을 끊여 먹었다. 라면 국물도 남기지 않고 먹는 고참을 생각하면서 야무지게 그릇을 박박 긁었다.
그리고 시간 맞춰 치킨을 사다 먹었다. 오후 6시까지 부대 복귀라서 망설였으나 남은 소주를 붉은 색의 플라스틱 컵에 따라 다 마셨다. 누런 벽지 속의 연예인이 (아마도 정윤희 였을 것이다.)승길과 눈이 마주쳤으나 애써 외면한 것은 하선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편한 잠을 잤다. 수십 명이 다닥다닥 붙어 자는 막사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나. 5성급 호텔이 따로 없었다. 하선이 두루마리 휴지를 잘라 승길에게 내밀었다. 허겁지겁 먹느라고 입술의 기름기를 닦을 새가 없었다.
하선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식탐을 보이는 자식 앞에서 이것도 군대 생활이라고 속으로는 혀를 찼지만. '누가 안 뺏어 간다, 천천히 천천히.' 체할까 걱정이 된 하선은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체하면 너만 손해다. 승길이 먹는 걸 멈추었다. 자식을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아버지를 챙기지 못했다. 닭다리는 다 먹어 치워 남은 것을 들고 “아버지, 이거 드세요.” 승길은 미안한 듯 손을 내밀었다.
“난 괜찮다.”
"드세요, 어서."
하선은 생각했다. '난 굶은 것에는 자신 있어.' 꼬박 3일도 굶은 적이 있었다. 1952년 3월 어느 날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뀌는 고지의 교통호에 갇혀 옴싹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통의 물도 떨어진지 오래였고 남은 부식이라고는 군홧발에 이겨져 진흙에 엉겨 붙은 건방 쪼가리뿐이었다. 그걸 큰 놈으로 골라 먹었다. 무엇이든 먹어야 살 수 있었다.
벗어나야 하지만 덫에 걸린 상태였다. 상부는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추가 명령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해가 뜨고 낮동안 눈이 녹아 교통호는 질척거렸고 몸은 추위에 쪼그라들었다.
그러면 하선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힘을 최대한 아껴야 해서 승길은 찌푸리는 인상까지 통제하려고 들었다. 그런 생지옥에서 살아왔다. 전쟁의 막바지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전선의 유불리를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이기는지 지는지 조차 알기 어려운 형국에서 휴가나 제대는 언감생심이었다. 대체 누구의 전쟁인지도 모른채 전쟁에 참여해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도 모른채 총부리를 겨눴다.
'지금은 전시도 아닌데 3일도 굶지 않았는데 아들은 마치 일주일 굶은 사람처럼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구나. 그래 먹어야지,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더 먹을래?"
하선의 물음에 승길은 고개를 내저였다.
"아버지 이제 가보셔야지요. 집까지 가려면 한 나절이 더 걸리는데."
하선과 작별하고 승길은 여관방에서 점심 지나 나왔다. 육담리 거리는 휴가나 외박 나온 병사들이 북적였다. 승길은 그들을 피해 다니며 시간을 때웠다. 어디가나 다 고참이었다.
눈에 안 띄는게 상책이었다. 부대 복귀는 4시끔 예상했다. 남은 시간은 다시 뒷골목에서 서성이면서 때웠다. 그러다 작은 가게서 소주 4홉 짜리 두 개를 샀다. 외박 나가면 필수품이었다.
그걸 그대로 부대로 가져가지 못하고 언덕배기에 있는 가짜 탱크의 몸통에 숨겨 놓고 야간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해는 약간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멀리서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아버지. 온전하게 돌아가겠습니다. 다치지 않겠습니다. 필승.'
하지만 다짐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나랏일처럼 그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두 번째 피비린내는 지오피에서 일어났다. 매목 작전에 나섰다가 앞선 매목조가 지뢰를 밟았다.
늘 다니는 길이었고 다른 길은 없었다. 눈 감고도 다니는. 하지만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며칠 전 내린 비에 대비를 하지 못했다. 전적으로 이 건은 상관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토사와 함께 발목 지뢰가 흘러 내려온다는 것에 대한 사전 주의가 없었다. 대열의 중간에 서 있어서 죽지 않고 살아왔던 하선 같은 천운이 승길에게 따라왔다. 삼대가 복 받을 일을 했나 싶을 정도로 그것은 운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쾅, 퓽. 화공작전 때 들었던 폭발음이 바로 앞에서 터져 나왔다. 대전자 지뢰를 밟은 것과 같은 충격이 고막에 전해졌다. 그리고 짙은 화약 냄새. 크레모아가 터졌나. 아니면 적의 기습 공격.
그건 확실히 아니다. 수류탄과는 다른 소리였기에. 아니 비슷한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뭐지? 한동안 앞에서 벌어진 일을 분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귀가 먹먹했고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본능적으로 승길은 치명타를 입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두 팔도 멀쩡했고 다리도 의지대로 움직였다. 폭발음에 귀에 이상이 생긴 것 말고는 다 괜찮았다. 고도가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진공 상태가 한동안 계속됐다.
분대장은 전방에 일제 사격 대신 엎드린 자세로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손동작으로 지시했다. 곧 상황은 파악됐다. 부상병을 들쳐 업고 후퇴하는 선두 매목조와 맞닥트렸다.
“지뢰다, 지뢰를 밟았다.”
그 목소리는 분명 겁에 질렸다. 얼굴도 보나 마나. 검은 칠을 한 그들의 표정을 야밤에 볼 수는 없었지만 사냥꾼에 쫓기는 짐승의 모습일 터.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몸뚱이에서 나오는 진한 피비린내. 두 번째 맡은 피비린내. 강하고 뜨거운 용광로 냄새. 젊은 청춘의 피에서는 그런 냄새가 났다.
발목 지뢰라면 십중팔구 발목이 잘렸을 것이다. 발목이 잘리다니, 종아리 아래 붙어 있어야 할 발목이 없다니. 중상이다. 말로만 듣던 일이 실제 눈 앞에서 벌어졌다. 몇 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전설처럼 드려 오던 일이.
“아버지, 전쟁도 아닌데 발목이 잘린 전우가 있어요. 아버지 전우는 전쟁터에서 그랬어요. 하지만 내 전우는 전쟁도 아닌데 발목이 사라졌습니다. 당연히 발도 없어요. 발목과 발이 없으니 달리기를 못하겠지요? 아버지, 아버지는 다리 잘린 전우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했나요? 알려 주세요. 저도 그게 필요합니다.”
승길은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뒤를 따라 철수하는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심장의 떨림이 다리까지 전해졌다. 발목 없이 달리는 기분이 이런 걸까. 매복이 두려웠다. 적의 기습공격이면 살아 남기 힘들다.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피비닌내와 같은 땀내가 역겨웠다. 통문에 도착해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통문을 여닫고 오가는 길은 저승길일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것이 실제 상황으로 발생하자 충격은 컸다.
트라우마. 자다가 깨서 지뢰다 폭발이다, 외쳤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됐다. 매목조에서 제외되지도 않았다. 그 날 이후도 승길은 계속 매목 작전에 투입됐다.
그것은 되레 경험으로 작용했다. 이런 일을 겪은 병사는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 어떤 산교육보다도 실전에는 미치지 못하다는 수색대장의 지론은 수정될 수 없었다.
제대 후에 승길은 발목이 나간 전우를 종각 근처에서 만났다.
강원도를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제대 전의 약속은 잊어버렸다. 혹시나 해서 걸어본 전화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승길은 순간 전화를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먼저 말했다. 승길은 지체했다. 한 번 더 여보세요. 그리고는 딸깍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했다.
먼저 누군지 물어보고 맞으면 나다 나, 니 군대 동기 승길이. 알지 너 김병장이지? 이렇게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고 끄적인 메모를 손에 들었다. 그만큼 시간이 흘러 누군지를 밝히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대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한참 동안 뛰던 심장이 진정되자 승길은 안도인지 미련인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첫 전화 후 세 번째 전화에서 통화가 이뤄졌다. 종로 금은방 골목 사이로 난 다방에서 승길은 예비역 김정수 병장을 만났다. 약속이 어렵지 만나니 쉽게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여전히 나팔은 불고?”
“나팔은 무슨. 거기 나온지 오래됐어. 한 3년. 처음엔 그럭저럭 했어.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불고 나서는 커튼 뒤 의자에 앉거나 의족으로 버텼는데. 아, 이건 아니다 싶었지. 평생 나팔 불며 살수는 없잖아. 직업이 있어야지 평생 직업.”
그래서 무슨일을 하는데 하는 표정에 김병장은 금은 세공일을 한다고 했다.
"종로에 금은방 많지? 거기 있는 금송아지, 금거북이 가운데 내가 만든게 많아."
그가 자랑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야, 잘됐다야, 애들 결혼하면 혼수는 네게 맡길게."
"고맙다 말이라도."
“결혼은?”
“물론. 안 했지. 나처럼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여자와 오래 사귀었지만 헤어졌어.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그런 너는 애는 몇이냐?"
"딸 아들 둘.'
담배를 나눠 피웠다. 한까치 담배도 나누어 피우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군가가 떠올랐다. 커피를 마셨다. 굳이 왜 만났는지 모를 정도로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중간중간 끊겼다 이어졌을 때 겨우 한다는 말이 다른 동기들은 만나? 정도.
“아니 아무도."
"나도 그래. 쉽게 연락을 못하겠어. 다들 먹고 살기 바쁘겠지.”
“그런데 너 강성중 알지? 우리 소대장. 그 사람 이번에 중령으로 진급했더라.”
김병장이 불쑥 소대장을 소환했다.
“니가 어떻게 알아?”
“어, 우리 가게 사장의 먼 친척인가봐. 내가 강원도 철원에서 근무했다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다 말했지. 딱 강소위야. 진급 할 만하지. 아마 별까지 달걸.”
“별까지 단다고? 그럴 만도 하지. 육사 출신에 선후배가 끌고 밀면. 별까진 쉽게 가겠지.”
“직장은? ”
“조그만 출판사에서 일해. 간혹 기사도 쓰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졌다. 다음에 또 보자면서. 다음에라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막연한 것이었다. 만날 수도 안 만날 수도 있는. 하지만 후자 쪽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