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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타락천사(1995)-스쳐지나가는 인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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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타락천사(1995)-스쳐지나가는 인연에 대하여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4.07.08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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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운명은 타고나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한다. 왕가위 감독은 <타락천사>에게 젊은 남녀를 등장시켜 그들의 '청춘 운명'을 시험하고 있다. 황지명(여명)은 타고난 킬러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살인을 밥 먹는 것보다 쉽게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그는 이미 그 분야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다. 주로 쓰는 무기는 칼이나 도끼 같은 구석기 시대의 것이 아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 닮게 쏘면 총알이 나가는 권총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두 개로 쏜다. 양손에 하나씩 쌍권총이면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백발백중이다. 타고난 킬러가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개인적 원한이나 복수와는 상관없다.

그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해치우기만 하면 된다. 적이 얼마나 많든 어떤 상황에 있든 그가 죽이기로 마음먹으면 모두 죽는다. 그는 이런 일이 좋다. 마음에 쏙 드는 일이니 이른 시기에 그만둘 이유 없다.

살인을 좋아하는 황지명은 청소를 싫어한다. 그래서 그를 대신해 방을 깨끗하게 해줄 여자가 필요하다. 바로 가흔(이가흔)이 그 역할을 한다. 그녀는 그의 방을 청소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챈다.

당연하다. 매일 방을 쓸고 닦다 보면 이런저런 물건과 영수증을 보고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아, 이 사람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짐작하게 된다. 가흔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냉혹한 킬러에 관심이 간다.

그 관심은 뜨거운 몸으로 확인된다. 침대 위에서 그녀는 가죽옷을 입고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자신의 몸을 자신의 손으로 자극한다. 이른바 마스터베이션. 킬러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아니 상상이라도 했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서라도 그녀와 접촉했을 터.

하지만 킬러는 자신의 이성 교제보다는 하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렇다고 끓는 피를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는다. 우연히 가게서 만난 금박의 여자와 하룻밤 질펀하게 보낸다.

금발의 여자는 하루로 만족하지 못한다. 킬러는 아니다. 그녀와 헤어진 후 킬러는 새로운 임무를 명 받는다. 그는 이 명령을 끝으로 살인 청부업에서 손을 떼려고 한다. 언제나 마지막을 조심해야 한다. 킬러의 운명은 손을 떼고 개과천선으로 가지 못한다. 마지막 임무가 그의 최후가 됐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번 스쳐 지나간다. 그 인연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번 스쳐 지나간다. 그 인연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 또 찌질한 남자가 있다. 하지무(금성무)는 다섯살 때 상한 통조림을 먹고 말못하는 사람이 됐다. 말을 못하나 알아 듣는 귀는 기막히다. 머리도 제법 돌고 주먹도 힘이 세다.

그래서 강매를 한다. 어거지로 물건을 판다. 사람들은 쉽게 말을 듣지 않는다. 폭력의 강도는 날로 세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행동이 범죄인지조차 모르는듯 하다. 상대를 죽사발 만들고 나서도 괴롭거나 힘들어하거나 이제 이짓 그만두자, 는 결심 같은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황지명처럼 젊기 때문에 애인이 필요하다. 조니에게 실연당한 스튜디어스가 그녀의 관심 여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잘 되지 않는다. 늙은 아버지를 촬영하는 것으로 위아을 삼는다.

아버지는 손사레를 치지만 아들은 계속 찍는다. 나중에 보니 아버지가 그걸 보고 좋아한다. 아버지에게 만은 효자 아들이다. 아버지에게 그는 좋은 아들로 기억됐을 터.

이런 영화 줄거리는 짜임새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관객에게 매우 불친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웰메이드 영화에서 제외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짜임새가 없어도 화면발로 이를 이겨낼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은 그런 재능이 있다.

지하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장면이나 휘황찬란한 홍콩의 밤거리를 흐릿하게 보여주거나 붉은 입술 사이로 빠져 나오는 담배 연기의 몽롱함이나 우연히 스쳐지나 가는 장면에 기가 막힌 배경음악을 깔아 놓는다면 스토리쯤이야, 무시해도 좋다는 여유가 생긴다.

리마스터링 화면이 좋다는 사람도 있고 원래 것이 마음에 든다는 사람도 있다. 취향 나름이지만 어느 것을 보더라도 영화는 기본을 넘어서고 있다. 타락한 젊은 남녀들이 벌이는 추한 짓이 손가락질로 매도 당하기보다는 아름다움으로 치장되고 있으니 말이다.

같은 감독의 직전 작품인 <중경삼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흡사하지만 좀 다르다.

국가: 홍콩

감독: 왕가위

출연: 여명, 금성무, 이가흔

평점:

: <서울의 봄>으로 자신의 능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린 김성수 감독의 <비트>에 나오는 정우성이 여명과 겹쳐진다. 잘생긴 얼굴에 머리 스타일도 비슷하다.

우수 어린 눈빛과 냉혹함도 그렇다. 킬러라고 해서 등에 용 문신을 새기고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그런 험상궂은 인물과는 달리 둘은 곱게 생겼다.

그 고운 얼굴이 냉정으로 돌아서면 물불 가릴 처지가 못 된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쏘는 쌍권총은 이 영화의 오마주가 틀림없다.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냄새가 난다’는 김선아의 화장품 광고 카피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두 여자가 지하에서 비켜 지나가면서 한 여자가 다른 한 여자를 뒤돌아보면서 내뱉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까운 사람과 어디서든 비켜 지나간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황지명 을 그리워 하는 여자와 하지무처럼. 하지만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는 기억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정말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운명처럼 사람마다 달리 작용하기 때문이다.

홍콩 영화가 한국대중 문화예술계에 끼친 마지막 영화라고 한다. 1995년의 홍콩과 지금의 홍콩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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