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높은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게 발밑이다. 천하가 다 그렇다. 세상에 혼자만이 우뚝 솟은 존재처럼 보인다.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홀로 깨달은 느낌이랄까.
고대하던 여행을 떠났는데 역시나 흡족한 마음이 들면 입보다 먼저 가슴이 열린다. 사놓고 여러 해 묵혀 두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비로소 해냈다는 성취감이 든다. 이걸 두 글자로 요약하면 행복이다.
장예모 감독의 영화 <연인>을 보고 나면, 아니 보고 있으면 이런 느낌이 든다. 며칠 걸어 산의 정상에 섰을 때, 학수고대 하던 여행지에 발을 디뎠을 때, 삼부작 시리즈의 두툼한 책을 막 덮었을 때 그 느낌 그대로다.
음모와 배신, 역전에 재역전,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는 안중에 없어도 좋다. 안 들려도 좋다. 그저 볼 눈만 있으면 된다. (너무 나갔나.)
그래도 스토리 없는 영화가 어디 있을까.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레오(유덕화)와 진(금성무)은 한패다. 이들이 언제까지 한 패 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처음은 그렇다. 여기에 메이(장쯔이)가 등장한다. (메이는 이들이 한 패 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가 영화의 중심축으로 돌아간다는 말씀. 애초부터 그런 건 아니다. 결론에 이르면 모든 것이 밝혀지지만 셋의 등장은 우선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때는 옛 중국의 어느 혼란한 시기라고 치자. 왕은 무능하고 음탕할 것이며 대신은 부패하고 역시 주색잡기에 빠져 있을 것이다. 이런 나라의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사회는 흉흉할 것이 뻔하다.
깊은 숲속에 수행자 무리가 모여있다. 백이숙제처럼 왕이 싫으니 숨어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고사리나 캐 먹으면서 신세 한탄을 하거나 세상과 단절한 것이 아니다. (백이숙제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권력에 맞써 싸운 인물로 기록된다.)
백성을 하찮게 여기니 백성들이 군주를 뒤엎기 위해(맹자가 주장했던가.) 함께 비도문을 수행하면서 반란을 꾀하고 있다. 꼴에 조정이랍시고 이들은 관군을 파견해 비도문을 열흘안에 소탕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의 수행자들이 앞서 말한 레오와 진이 되겠다. 둘은 기방에서 일하는 메이를 체포한다. 비도문 수장의 딸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조정의 하수인을 경멸하고 그녀에게 측은지심을 보낸다. 하지만 메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앞을 보지 못하지만 앞을 보는 사람을 능가한다.
메이가 춤을 추고, 칼춤을 추고 펄럭이는 옷자락으로 북을 칠 때면 관객들은 산의 팔부 능선쯤에 올라가 있다. (그러니 쉬지 말고 더 가자.)
감옥에 갇힌 메이. 그러나 자객(진)이 들어와 그녀를 탈출시킨다.
쫒기는 자와 쫓는 자의 한 판 싸움이 벌어진다. 그 싸움은 현란하다 못해 눈부시다. 특히 대나무 밭의 싸움은 주윤발과 장쯔이가 벌였던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을 떠올린다. 아니 그보다 한 발 앞선 버전이라고나 할까.
대나무의 특성을 고려한 감독의 디테일이 놀랍다. 여기까지 오면 관객들은 메이가 잡히느냐보다는 메이와 진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될지 더 궁금하다.
한편 메이는 심봉사의 딸처럼 공양미 삼백석에 눈을 뜰까. 아니면 애초부터 맹인 흉내를 내면서 속였을까. 메이와 진, 둘은 맺어질까.
이런 의문이 들 때 쯤이면 관객들은 산정에 올라 야호! 하고 소리치며 메아리 소리를 기다린다.
무협지를 좀 본 관객이라면 검객들의 최후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주인공 중 하나는 죽게 된다는 걸. 그게 진일까, 메이일까. 그리고 레오의 진짜 모습은 밝혀질까.
국가: 중국, 홍콩
감독: 장예모
출연: 장쯔이, 금성무, 유덕화
평점:

팁: 셋의 싸움은 오래도록 계속된다. 붉은 단풍에 흰 눈이 내리면 관객들은 그제서야 이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한다.
짜고 쳤던 연극의 결말치고는 우습지만 젊음과 사랑 앞에서는 다 용서된다.
그렇다면 최후의 승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는? 메이의 사랑은 3년을 기다린 유덕화로 쏠릴까 아니면 3일간 만난 금성무 품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 둘 모두일까?
그 사랑은 이루어질까.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 바람을 따라갔던 메이의 사랑은 해피 앤딩일까?
이 모든 궁금증에도 불구하고 결말을 말할 수 없다. 이 멋진 영화는 말로, 글로 아무리 설명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직접 보라는 의미에서 친절한 영화평도 더는 이제라도 말할 수 없다. 다만 남녀의 사랑은 무협의 세계로 빠져들수록 더 진하고 흥미롭고 아름답고 처절하다는 것을 재확인 했다는 것 뿐.